
# ‘총기 청정국’의 역설과 내재된 폭력성
지난 7월 20일 인천시 송도의 한 아파트에서 62세의 조모 씨가 직접 만든 사제(私製) 총으로 아들 A(34)씨를 살해했습니다. 당시 A씨가 생일을 맞은 조씨를 초대해 생일잔치를 열었는데, 조씨는 유튜브를 보고 쇠파이프를 잘라 만든 사제 총기로 잔치상 자리에서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조씨가 혼자 사는 서울 도봉구 집에선 사제 시한폭탄도 발견됐습니다. 조씨는 아들 A씨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아들이 아내와 이혼을 내 잘못으로 몰아 다툼이 잦았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조씨는 20여 년 전 아내 김모 씨와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 5일 뒤인 7월 25일 넷플릭스 드라마 <트리거>가 공개됐습니다(김혜수 주연의 <트리거>와는 다른 작품입니다). 저는 지난 주말에 충격을 느끼며 이 10부작 드라마를 완주했습니다. 드라마는 ‘총기 청정국’ 대한민국에 불법 총기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에게 배달되면서 사회 전체가 공포와 혼돈에 빠지는 상황을 그렸습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대사에도 나오는 '정서적 전쟁상태'의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사회 이면에 누적된 분노와 혐오, 그리고 전 국민의 절반이 총기 사용법을 안다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잠재적 폭력성을 드라마는 ‘총기’라는 극단적 상징을 통해 보여줬습니다.
https://youtu.be/QOk-7wazEX4?si=KRn17Gl58JEVuiuB
드라마 속 익명의 세력이 시민들에게 총기를 배달하는 상황은, 현실에서 온라인 공간을 통해 증오와 혐오가 확산되는 양상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평범한 시민들이 그 도구가 되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쏘는 모습은 현재 한국 사회의 갈등 양상을 극명하게 반영합니다.
# 한국 사회의 '갈등 공화국' 현실
한국 사회는 이미 '갈등 공화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었습니다. 국제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정책연구소가 2021년 전 세계 28개국 성인 2만3천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 결과에 따르면, 전체 12개 갈등 항목 중 진보-보수 갈등, 부유층과 빈곤층 간 갈등을 포함해 절반이 넘는 7개 항목에서 한국인들이 느끼는 ‘문화전쟁’ 강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문화전쟁은 한 국가 안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계층, 소득이나 자산, 연령, 성, 종교, 인종, 지역 등이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충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설문 결과는 단순한 통계적 수치를 넘어서, 한국 사회가 구성원 간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임을 뜻합니다.
<트리거>에서 총을 배달받은 사람들이 점차 서로를 의심하고 적대시하게 되는 과정은 현실의 한국 사회에서 이념 갈등, 세대 갈등, 직장 내 갑질, 빈부 갈등, 젠더(性) 갈등, 지역 갈등이 일상화된 모습과 겹쳐집니다(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치적 극한 대립은 빠져 있습니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증폭되는 혐오 표현과 극단적 대립은 마치 각자에게 ‘정서적 총기’가 배달된 것과 같은 효과를 낳고 있지요.
# 압축 성장의 그림자와 정서적 외상
한국 사회의 정서적 전쟁상태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축적된 사회적 모순, 냉전 체제 아래서 형성된 이념적 대립,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경쟁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불평등과 박탈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와 분노를 안고 총을 드는 것처럼, 현실의 한국인들도 개인적 좌절과 사회적 불만을 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투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특히 취업난(비정규직 문제 포함), 학교폭력, 전세사기 피해 등 개인의 삶을 압박하는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만성적 스트레스와 분노가 팽배해진 상태입니다.
# 디지털 시대의 증폭된 갈등
<트리거>에서 총기가 택배로 배달되듯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갈등과 혐오가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동질성을 추구하는 집단 내에서 타인의 의견을 배제한 채 극단적 의견을 증폭시키는 ‘반향실 효과(反響室 效果, echo chamber effect)’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소통을 차단하고,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결국 반향실 효과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며 진실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특히 젠더 갈등, 세대 갈등 등에서 나타나는 극단적 대립은 마치 각자가 서로를 향해 '정서적 총기'를 겨누고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지요. 온라인상에서 익명성에 기댄 무차별적 공격과 혐오 표현은 사회적 신뢰를 파괴하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와해시키고 있습니다.
# 트라우마의 사회적 전이
드라마에서 총기를 사용한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사회 전체가 공포에 휩싸이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트라우마의 사회적 전이 현상’을 보여줍니다. 세월호 참사, 코로나19 팬데믹, 건설 현장의 붕괴 등 사회적 사건과 사고들이 누적되면서 사회 구성원들의 불안과 공포가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런 집단적 트라우마는 타인에 대한 신뢰 저하,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 그리고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드라마 가운데 총기 소유 합법화 찬반을 둘러싸고 대립한 시위 현장에서 총기를 든 시민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한국인들이 보이는 사회적 고립감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지요.
# 회복과 치유의 가능성
그러나 <트리거>가 단순히 절망적인 현실 진단에 그치지 않듯이, 한국 사회의 정서적 전쟁상태도 불가역적인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에서 정의감 넘치는 경찰과 선한 사람들이 위기 속에서 손을 잡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갈등을 넘어선 연대와 협력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개인의 총기를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들게 만든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는 겁니다. 구조적 불평등의 해소, 소통과 대화 문화의 복원, 그리고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트리거>는 극한 상황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재를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총이라는 물리적 무기는 없을지라도, 우리 사회에는 이미 수많은 '정서적 총기'들이 배달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내려놓고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문제적 드라마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인물이 원하는 것도 이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참고한 자료: 한겨레신문, “‘다이내믹 코리아’ 한국, 가장 격렬하게 ‘문화전쟁’ 느끼는 나라”(202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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