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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추석의 '길티 플레저'

by 빅용가리2 2025. 10. 7.

앗, 나물 반찬 등에 랩도 안 씌웠네요. 아직까지 생성형 AI는 디테일에 약하네요.

송편 앞에 선 오십 대 남자

"하나만 더."

나는 주방 식탁 앞에서 또다시 중얼거린다. 방금 세 개를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개다. 아까 커피 마시면서 먹은 건 세지 않기로 했으니까.

송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달콤한 깨 송편을 한입 맛보면서 생각한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를 느낀다니. 나이 들면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죄의식을 느끼면서 동시에 엄청난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를 가리키는 길티 플레저에는 무덤덤해질 줄 알았건만.

한가위를 이틀 앞둔 날, 아내는 굳이 송편을 빚겠다고 했다. 마트에서 사거나 쿠팡으로 주문하면 번거롭지도 않고 겁나 편한데. "당신, 많이 만들지 마. 우리 세 식구밖에 안 되는데 언제 다 먹어."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좋고 감사했다. 많이 만들어줘서.

‘혈당이 걱정된다고? 콜레스테롤이 문제라고? 그건 내일 생각하기로 하자.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라고 했으니까. 오늘만큼은…’.

 

명절의 이중생활

추석 아침, 나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된다.

"여보, 차례상 준비 도와줄까?"

주방에서 일하는 아내를 거들며 말하지만, 내 눈은 이미 갓 부쳐진 동그랑땡을 향해 있다. 뒤집개로 하나를 접시에 옮기는 척하면서 살짝 입으로 가져간다. 헐, 뜨겁다. 혀를 데었지만 참는다. 존맛탱, 정말 맛있다.

"당신 지금 먹었죠?"

"아니, 간 본 거야."

50대에도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아내한테.

차례를 지내고 나면 친척들이 찾아온다. 형님과 처남, 동서들. 우리는 거실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진지한 척한다. 경제 이야기, 정치 이야기, 자식 이야기.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다음 술상 생각뿐이다. 잡채가 남았을까? 갈비찜은?

"이 서방, 요즘 운동 안 해?"

형님이 자전거 튜브를 두 개쯤 두른 내 배를 쳐다본다. 나는 웃으며 받아친다.

"오십보 백보, 형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는 동병상련의 미소를 짓는다. 오십 대 남자들의 배는 명절을 증명하는 훈장이다.

 

소파의 제왕

오후 네 시. 친척들이 모두 떠나고 집은 고요해진다.

나는 소파에 몸을 던진다. 허리가 뻐근하다. 절을 몇 번이나 한 건지 모르겠다. 평생 불평을 모르는 ‘지니’에게 채널을 돌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추석 때마다 찾아오는 단골손님 성룡의 액션이 멋진 특선영화가 나온다. 10년 전에도 봤던 영화다. 그래도 본다.

"여보, 설거지 좀 도와줘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못 들은 척한다. 5분만. 아니, 10분만 더.

눈이 스스로 감긴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낮잠이다. 젊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아버지가 명절마다 소파에서 “드르렁, 푸~”하고 코를 골며 주무셨는지. 이제 안다. 이게 바로 진짜 휴식이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입이 텁텁하다. 냉장고에 식혜와 사이다가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명절에는 식혜지.’ 생각하며 한 컵 따라 마신다. 시원하다. 근데 왜 또 출출해지지. 내 뱃속의 거주자, 거지는 추석을 맞아 파업도 안 하나.

 

심야의 냉장고 습격사건

밤 열한 시 반. 아내는 피곤한지 벌써 잠들었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 문을 연다. 주황색 LED 불빛이 어둠을 밝힌다. 마치 보물창고 같다. 갈비찜, 잡채, 육전, 과일, 그리고 송편.

건강검진 결과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혈당 관리하셔야 해요. 야식은 특히 조심하시고요."

미안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오늘만큼은.

갈비를 하나 집어 든다. 식어도 맛있다. 아니, 어쩌면 더 맛있다. 역시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라는 말은 국룰이다. 차갑게 식은 갈비의 육즙이 진하게 느껴진다. 잡채도 한 젓가락. 동그랑땡도 하나.

그리고 마지막 송편.

삼킬 때마다 죄책감과 행복이 동시에 밀려온다. 내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서면 분명 숫자는 소고기 한 근 이상 늘어 있을 것이다. 헬스장 트레이너가 속으로 쯧쯧하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포만감과 행복의 이중주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명절 다음 날의 성찰

추석 다음 날. 일어나니 온몸이 무겁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부어서 푸석하다.

"당신, 간밤에 또 냉장고 털었죠?"

아내가 웃으며 묻는다. 부인할 수 없다. 증거는 냉장고 안에 있다. 눈에 띄게 비어버린 갈비찜 통.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명절인데. 나도 몰래 송편 두 개 더 먹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는다. 결혼 28년 차 부부의 공모.

아침 식사 후, 나는 운동화를 신는다. 동네 한 바퀴 돌아야겠다. 어젯밤 먹은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

하지만 걸으면서도 생각한다. 1년에 딱 한 번, 이 정도 방종은 괜찮지 않을까? 젊었을 때처럼 막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억압하며 사는 것도 서글프지 않나.

오십 대의 길티 플레저는 이십 대의 그것과 다르다. 더 죄책감이 크지만, 동시에 더 소중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언제까지 아내가 만든 명절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갑자기 지난달 조찬포럼에서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난다. "한국 사람은 미래를 불확실하게 느끼기 때문에 현실에서 (선택지를) 모두 포기하지 못한다. 마침 짬짜면처럼."  

 

내년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남은 음식을 나눠 담고 있다.

"이거 대전에 가져가서 며칠 드세요."

냉동실에는 벌써 지퍼백에 담긴 송편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주중 근무를 마치고 주말마다 용인 집에 와도 충분히 한 달은 먹겠구만!

나는 안다. 다음 주쯤이면 "또 송편이야?" 하고 투덜거릴 것을. 그러다가도 해동해서 하나 먹으면 추석날이 떠오를 것을.

그리고 내년 추석이 되면, 나는 또다시 송편을 네다섯 개씩 몰래 먹을 것이다. 소파에서 낮잠을 잘 것이다. 한밤중에 냉장고를 열 것이다.

예순이 되어도, 아마 이 습관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명절이니까. 그게 바로 가족이니까.

길티 플레저? 이제는 그냥 플레저다. 죄책감을 느끼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특히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여보, 송편 하나 더 먹어도 돼?"

"당신 혈당 관리해야 한다며?"

"그건 내일부터."

"그래요, 많이 드세요. 명절인데 뭐."

이게 바로 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