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TG?
많은 사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심신을 약하게 만드는 현상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와 한쌍을 이루는 ‘외상 후 성장(PTG, post-traumatic growth)’이란 긍정적 현상에 관해선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PTSD는 전쟁, 테러, 천재지변, 신체적 폭행, 성폭력, 교통사고 등 생명을 위협할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경험한 뒤 나타나는 정신질환으로 보통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를 동반합니다.
PTG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리처드 테데스키(Richard Tedeschi)와 로런스 캘훈(Lawrence Calhoun)이 정립한 개념으로 심리적 충격이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뒤 내면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는 과정을 뜻하지요.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포로 수감 생활이 길수록 신체 부상을 경험할 확률이 더 높았고,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할 가능성도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심각한 외상을 겪으면 세계관과 그 안에서 세워진 여러 전제가 산산이 무너집니다. 기존의 신념 체계가 무너진 덕분에 오히려 사건이 초래한 경험과 삶에 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고 내적인 힘이 성장해 불행을 이겨내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미국 마운트시나이 의과대학의 정신과 의사 아드리아나 페더(Adriana Feder)와 동료들은 “심각한 외상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도록 촉발하고 인생의 목표를 근본부터 재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한 개인은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이들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정을 경험하고 부정적으로 반추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요. 그러나 이들에게는 괴로움을 가만히 살피며 관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의식에 침투하는 생각을 반추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나쁜 감정과 생각에 휩쓸리지만, 이들은 심리학자들이 ‘의도적 반추(deliberate rumination)’라 부르는 전략을 활용해 외상 경험을 의도적으로 되새기며 의미를 찾고 고통을 완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서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한 2014년 개봉작 《언브로큰(Unbroken)》이 생각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TMnFXPqtqKM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미국의 육상 선수 루이 잠페리니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폭격기 추락 사고로 태평양에서 장기간 표류한 끝에 일본군 포로가 되고 극심한 폭력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그는 굶주림과 자연의 위협을 견디고 살아남지만,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잔혹한 폭력과 고문, 특히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일본군 장교로부터 끊임없이 굴욕과 학대를 받으며 육체적·정신적 한계까지 몰리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루이는 심각한 트라우마와 분노에 시달리지만, 신앙과 가족의 지지, 자신을 학대한 이들까지 용서하려는 결심을 통해 다시 삶을 이어갈 힘을 찾게 되지요.
조지메이슨대학교의 심리학자 토드 카시단(Todd Kashidan)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든지 심신 쇠약을 유발하는 사고, 또는 가정 폭력으로 고통을 겪은 170여 명의 대학생을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불안감과 외상을 겪고도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성찰한 학생이 외상 후 성장으로 변화가 가장 크게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볼 때 외상 경험을 자기 이야기 안으로 통합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절망적인 투쟁과 고통에서도 ‘의미(意味)’를 찾아냅니다. 의미에는 우리 마음이 삶을 떠나지 않도록 결속하고 문제에 대응하고 고통에서 회복하도록 돕는 힘이 있습니다.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해도 곧장 절망감에 빠져들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도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신 의학자로서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발표한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사람들이 겪은 역경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수감자는 자유를 간직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운명에 어떤 식으로든 적응할 자유가 있다. 그곳에서도 우리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저는 군 복무 시절 진중문고 도서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힘든 군대 생활에서 의미를 찾고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다지겠다는 선택지를 고른 경험이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강인함의 힘』(스티브 매그니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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