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A 씨는 사장단 앞에서 업무 계획을 발표하다가 내용에 대한 몇 가지 지적을 받았다. A 씨는 지적받은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발표를 마쳤지만 ‘무능하다고 찍힌 게 틀림없다’는 불안감이 덮쳐왔다. 그는 '앞으로 승진은 글렀고, 연봉은 한 푼도 오르지 않을 것이며, 곧 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이직이 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위기 상황에 걱정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위의 사례처럼 중간 과정 없이 극단적인 결론으로 치닫는 경우엔 얘기가 좀 다르다. 이들은 특정 생각에 꽂히면, 마치 고속도로에서 가속페달을 밟듯 최악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러다 보면 실제 일어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착각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망했다’ ‘끝장이다’라며 스스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사람들은 왜 그런 걸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가능한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는 것을 '파국화(破局化·catastrophizing)' 또는 '재앙화 사고'라고 한다. 사소한 일이 비합리적으로 과장돼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게 특징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이제 난 끝장이야’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 ‘분명 난 입이 얼어서 한 마디도 못할 거야. 면접에서 떨어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발전되고, 심하게는 ‘애인도 별 볼 일 없는 나를 버리고 떠나겠지. 외톨이가 되고, 부모님마저 돌아가시면 혼자 쓸쓸히 죽어갈 거야’라는 반응으로까지 이어진다.
매우 빠르고 자동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부정적 사고는 불안, 우울,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누구나 느끼는 정도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파국화 반응을 만나면 폭발해 지레 좌절하고 포기해버린다. 시험에서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표정은 ‘고독한 죽음’에 가 있다. 그걸 바라보는 면접관의 평가가 좋을 리 없다.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좌절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좌절을 먼저 했기 때문에 떨어지는 셈이다.
파국화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미국의 심리학자인 앨버트 엘리스는 “사람들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과 관련한 극단적인 신념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인간은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점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고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엘리스는 잘못된 신념을 수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런 벡은 우울증 환자를 연구하면서 이들에게 파국화와 같은 공통된 사고 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사고 과정을 통틀어 인지 오류(cognitive errors)라고 불렀다. 생각에 논리적 비약이 있다는 의미다. 파국화를 비롯해 한두 사례만으로 일반적 사실로 믿어버리는 과(過)일반화, 세상을 흑백논리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 등도 인지 오류다.
탈(脫)파국화의 첫 걸음은 나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가는 부정적 생각을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박기환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장)는 “불안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불안한지, 이때 신체감각은 어떤지, 무슨 생각이 드는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그 생각이 적절한지를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최악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을 짚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어 혼자서도 해볼 수 있다. 최악의 결과를 지지하는 객관적 근거와 그에 반하는 근거를 각각 나열해 보고, 더 확실한 쪽을 택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앞서 사장단 앞에서 발표 후 이직을 고려하는 A 씨의 사례로 살펴보자. ‘회사에서 무능하다고 찍혔다’는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로 ‘발표 내용을 지적받았다’ ‘사람들이 왠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것 같았다’ ‘발표가 끝난 뒤 아무도 잘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반박할 근거로 ‘지적받은 내용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마무리 지었다’ ‘발표를 못했다고 직접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발표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듣는 사람도 있었다’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때 다른 사람의 한심하다는 표정과 같은 주관적인 느낌은 실제 사실과 다를 수도 있으므로, 판단 근거에서 제외한다.
이렇게 하나씩 따져보면 회사에서 찍혔다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반대 근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직해야 한다는 최악의 결과는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부정적 생각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떠오르기에 반복적 훈련이 요구된다. 박 교수는 “잘 풀리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가장 현실 가능한 결과는 무엇인지 스스로 답하면서 현실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참고자료: 자존감 수업(윤홍균 지음), 동아일보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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